언젠가는 리뷰를 한 번 해야지 하고 있던 중국드라마가 있다.
번화, 繁花 (영어 제목은 Blossom Shanghai) , 상하이와 중국이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던 시절을 의미하는 제목이다.
2023년말에 중국 국영티비인 CCTV8에서 TV 시리즈로 나온 30부작의 중국 시대극이다.
아시아의 뉴욕 (여담이지만 상하이에는 뉴욕대학교의 상하이 캠퍼스 NYU Shanghai 가 운영되고 있다), 중국에서 자본주의와 가장 찬란한 시대를 상징하는 곳, 바로 상하이. 게다가 홍콩 최고의 감독 중 한명인 왕가위 감독이 최초로 메가폰을 잡은 드라마 작품이라니. 우리에게는 화양연화, 아비정전, 2046 등의 영화 대작으로만 알려져 있던 감독이었는데, 드라마라니. 그것도 중국에서 첫 작품이자 첫 드라마 작품이라고 한다. 이번에 블로그를 쓰려고 찾아보다가 안 사실인데 왕가위 감독도 중국 상해에서 출생하여 5살까지 자라다가 홍콩으로 이민간 이주 홍콩인이었다. 홍콩으로서의 정체성을 누구보다도 작품에 담는 사람이었지만 중국 본토, 거기에 상하이 사람의 정서가 있던 것이었다.
24년초 볼만한 드라마가 뭐 없을까 동영상 사이트를 찾아보던 나에게 우연히 다가온 이 드라마는 정주행 일주일만에 모든 회차를 보게 만든 가히 중국에서 10년에 한 번 나올만한 대작이자 명작이었다.
그런데 2025년이 되고 작품이 끝난지 1년만에 드라마의 여운을 회고시켜주는 단막 형식의 번외편이 방영되었다.
(중국어 되시는 분들은 여기 링크에 들어가시면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자마자 그 동안 미뤄왔던 번화와 관련한 블로그를 빨리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해야할 생각들이 많다. 상하이, 왕가위 감독, 후꺼, 탕이엔 등 많은 소재들이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1)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여러가지 화제를 일으켰던 대작 드라마.
- 중국은 공산국가인 만큼 모든 문화 컨텐츠에 사전 검열을 실시한다. 특히 티비에서 방영되는 드라마의 경우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에 검열이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그리고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번쯤은 다 들어봤을 '한한령' 이후로 중국에서 방영되는 해외 드라마에 대한 검열이 매우 까다롭게 진행되고 있고, 중국 내에서 제작되는 드라마 역시 소재의 제한(시대, 정부를 비판하거나 일반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 환타지 적인 내용 등)이 너무 많아 최근 몇년간은 중국에서 나온 대작은 대부분이 사극이거나 간간히 코미디를 위주로 한 시트콤이었다.
그만큼 중국 내에서 이런 시대를 배경으로한 작품을 만들어내기가 참 어려운 환경이고 게다가 중국과의 관계로 인해 첨예한 대립을 아직도 진행하고 있는 '홍콩'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인 왕가위 감독이 직접 메가폰을 잡은 드라마라고 하니 제작 전부터 매우 화제가 된 작품이었다. 왕가위 감독은 이 원작 소설을 읽고 작품을 만들기 위해 거의 10년간을 생각하며 준비했다고 한 인터뷰에서 말하기도 했다.
첫회가 방영되고 나서 중국 전역에서는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첫주의 전국 시청률이 2.65% 가까이 나왔다. (중국에서는 TV 시청률이 1% 넘으면 성공한 거고 2% 이상되면 엄청난 화제가 된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뜨거운 반응과 왕가위 감독의 드라마 작품이라는게 신기했는지 보기 드물게 국내 몇몇 언론에서 이 작품에 대한 기사를 다루었다.
2) 드라마의 줄거리와 배경
- 이 드라마의 주요 줄거리는 1980년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에 경제의 중심지인 상하이에서 벌어지는 격변의 시기에 대한 당시대 사람들의 모순과 변화에 대해 그린 이야기다. 중국 정부는 개혁개방을 했지만 그 체제는 공산당의 계획 경제에 따라 철저히 독과점 형태로 운영되었다. 특히 기존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던 정부소유의 기업들이 민간 기업에 일감을 이양하면서 곳곳에서 신흥 부자들이 탄생하기 시작했고, 상하이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증권시장이 시작되면서 그야말로 엄청난 주식 매수의 붐이 일어나던 시기였다. 드라마를 보면서 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주식과 해외 무역 등으로 부를 일군 신흥 부자들과 격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모순과 시대적 변화를 극적으로 잘 묘사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 이 드라마에서 주요 배경으로 나오는 황허루와 피스 호텔(허핑판디엔, 和平飯店) 은 상하이 와이탄에 위치한 핵심 지역 중 하나이다. 피스 호텔이 있는 곳은 와이탄에서도 최 중심지라고 불리는 난징동루의 시작점으로 우리나라에 굳이 비교할 곳을 찾는다면 과거 오랜 명성을 갖고 있던 명동과 남대문시장의 시작점에 위치한 조선호텔 쯤이 될 것 같다. 지금도 피스호텔은 패어몬트 호텔 체인이 관리하며 상하이에서 최고급 호텔 중 하나로 운영되고 있고, 바로 옆에 페닌슐라나 왈도프아스토리아 등 글로벌 럭셔리 체인들 속에서도 당당히 위용을 보여주고 있는 최고의 호텔이다. 황허루는 우리의 무교동이나 을지로 쯤 될 것 같다. 우리의 명동같은 난징동루 바로 옆으로 난 골목 중 하나로 지금도 상하이의 유명 맛집들이 일부 운영을 하고 있고, 비록 화이하이루나 징안스 같은 번화가는 아니지만 나름의 시대적인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하자마자 황허루는 드라마의 명소를 찾아보기 위해 온 관광객들로 수개월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3) 드라마의 주인공인 후꺼(胡哥) 와 탕이엔(唐嫣)
- 드라마의 줄거리나 배경 못지 않게 원작의 내용을 정말 극적으로 살려준 것은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뛰어난 명연기가 아닌가 싶었다. 상하이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상하이 사람들을 출연 배우 대부분으로 채운 왕가위 감독도 대단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런 뛰어난 연기력을 보여준 후꺼와 탕이엔 두 배우는 정말 이 드라마를 중국 최고의 드라마라고 부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꺼가 연기한 바오종(보사장) 과 탕이엔이 연기한 왕샤오지에(미스 왕)은 당 시대의 신흥 부유층과 공기업의 알력 관계는 물론 시대적 흐름 속에서 각자의 생존 방식을 잘 보여주었고, 젊었던 20,30대 시절을 연기하며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애정과 우정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일적인 관계로 시작한 만큼 서로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려웠던 역할적 제한도 있지만, 그 당시 중국이 막 개방하면서 보수적이고 조심스러운 중국 당시의 젊은층의 모습은 지금 누구보다도 개방적이고 할말 다 하는 젊은 중국청년들과 대조되며 매우 애틋하면서도 재미있는 모습들을 잘 연출했다.
4) 상하이화, 그리고 왕가위 감독만의 영화적 연출
- 이 드라마의 최고봉은 무엇보다 왕가위 감독의 뛰어난 영화적 연출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최고는 바로 상하이 배경의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것이다. 난 과거에 상하이에 3년 넘게 살고, 상하이를 중국 최애 도시로 생각하고 애정하는 만큼 상하이화(상하이 방언)에 대한 애정도 꽤 있는 편이다. 비록 말을 자유롭게 구사하지는 못하지만 간단한 몇 마디를 배우고 자주 사용했고, 상하이 사람들 특유의 표현이나 말투를 무척이나 좋아했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중국어 보통화(표준어)버전과 상하이화 버전의 2가지 버전을 동시에 출시했고(중국 국영방송인 CCTV 에서 방영하려면 중국 전역에 나가는 만큼 보통화로 더빙을 하는 것이 매우 당연시 된다. 게다가 중국은 배우들이 표준어를 사용한다고 해도 각자 다른 지역에서 와서 서로 다른 억양으로 중국어를 하는게 보통이라 후시 녹음을 해 보정하는 일이 아직도 꽤 보편화되어있다.) 상하이말로 나오는 중국 대작을 보는 것 자체로도 꽤 흥분되는 일이었다. 일개 외국인으로 불과 3,4년 밖에 살지 않았던 나도 이런 감개무량한 기분이었는데 상하이말로 홍콩 최고의 감독이 연출한 작품을 보는 상하이사람들의 자랑이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개인적으로 중국에 10년 넘게 살면서 중국의 발전이 가속화되던 시절인 2천년 전후부터 2010년 절정에 이른 시기까지 나 역시 많은 일들을 겪었다는 생각을 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과거 상하이에서 있었던 많은 우여곡절과 추억들이 회상됨은 물론 중국인들이 느끼는 자신들의 '그때 그 시절' 은 정말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난 영상미와 연출, 배우들의 명연기, 촘촘한 스토리는 물론 동시대,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추억들을 함께 공유하고 이렇게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어가 가능하신 분들에게 꼭 추천드리고, 혹시나 한국어 자막이 필요하신 분들은 제가 따로 중화TV에 문의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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